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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채현채
등록일: 26-03-24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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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는 죽음에 관심이 많았다. 죽음을 거짓과 무의미뿐인 속세의 삶에서 영적으로 해방되는 기회로 보는 형이상학적 죽음관이 기본 토대였겠지만, 유년기에 어머니 아버지를, 그리고 이어 후견인이었던 고모를 죽음으로 잃은 경험도 무/의식의 차원에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는 30대에 『세 죽음』을, 60대에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그로부터 약 10년 후인 70대에 『주인과 일꾼』을 썼다. 죽음에 관한 사유를 평생 멈추지 않았던 거다. 셋 모두 은유적 성격이 강한 이야기이지만, 특히 1886년에 집필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삶과 죽음 전체를 하나의 투명한 은유로 이야기함으로써, 삶과 신천지릴게임 죽음의 ‘실상’을 남김없이 치밀하게 포착해 내려는 시도다.
점점 더 독한 외로움 속에 홀로 내쳐진 채, 삶이 사라지는 어둡고 고통스러운 ‘파멸의 심연’으로 점점 더 깊이 ‘내려가는’ 내적 성찰과 고백은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영적 ‘구원’으로 비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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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프 톨스토이 저 『이반 일리치의 죽음』(윤우섭 역, 현대지성, 2023년)
풀리지 않는 삶과 죽음의 수수께끼
릴게임갓아직도 살아있는 은유로서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1인칭 죽음의 (서사) 불가능성을 최대한 극복하고자, (가능한 1인칭 화자의 시점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3인칭 화자의 시점에서 이반 일리치의 내면을 기술한다. 그의 아내와 자식들, 법원 동료들을 묘사할 때는 잠시 전지적 작가 시점이 활용되기도 하지만, 릴게임뜻 텍스트 전체를 관통하며 물들이는 건 이반 일리치의 질문, 느낌, 생각, 회한, 희망, 절망이다.
그는 아이에서 성인으로 성장하면서 거짓과 진실의 대당이 아니라, 소위 불쾌와 유쾌의 대당으로 삶을 조망하고 조율해 왔다. 나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저 질병의 한가운데에서 그는, 품위로 치장한 교양 계급의 위선과 진짜 유쾌했던, 기억하고 싶은 삶 알라딘릴게임 의 경험이라는 대당을 두고 저울의 가늠을 옮긴다.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이 주변인 모두의 거짓(된 삶)이었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영적 해방과 구원을 막아선 건 자신의 삶이 모조리 기만일 수는 없다는 믿음이었다. 진짜 유쾌했던, 그래서 기억하고 싶은 삶의 경험이 단 한 조각도 없을 수는 없다는 ‘전면적 자기 부정(否定)의 부인(否認)’이었다. ‘마땅히 살아야 하는 대로 살지 않았다는 최종적인 고백’은 그의 안에서 터져 나오지 못한 채/않은 채 그를 짓눌렀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은 끝났고, 죽음의 시간이다!
그런데 이게 뭐야?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된 거지? 그럴 수는 없다. 삶이 그렇게 무의미하고 역겨운 것이었을까? 그런데 만일 삶이 그렇게 역겹고 무의미하다면, 왜 죽어야 하고, 고통 속에 죽어야 하는 거지? 뭔가 잘못된 거다. '어쩌면 내가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살지 않은 건 아닐까?' [...]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했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지?' [...]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그는 속으로 되풀이했다. '여기가 그 법정이다! 그러나 나는 잘못이 없어!' 그는 화를 내며 소리 질렀다. '무엇 때문에?' [...] 왜 무엇 때문에 이 모든 두려움이 생긴 거지?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윤우섭 옮김, 현대지성 ebook, 57쪽)
그는 ‘이 고통과 죽음이 무엇 때문인지’ 묻고 또 묻는다. “그런데 만일 삶이 그렇게 역겹고 무의미하다면, 왜 죽어야 하고, 고통 속에 죽어야 하는 거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삶의 의미가 없이는 죽음이 가능할 수 없다고 몸부림치며 항거한다.
자연의 세계에서라면 생존 자체가 삶이고 의미다. 내부와 외부의 구별이 없는 이곳에서 살아있음은 이미 의미를 품고 있으며, 죽음 또한 그 안에 공생한다. 그러나 살아있음과 의미가 더이상 하나가 아닌 인간의 삶에서, 죽음의 가능성은 삶의 의미에 달려있다는 거다.
한 세기도 훨씬 더 전에 집필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죽은 은유가 아니라 살아있는 은유로 읽힐 수 있는 건, 다름 아닌 바로 이 질문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기존의 주요 ‘해석’이 그러하듯 예수의 십자가 부활이라든가, 속물적 삶을 내파하는 영적 깨달음이라는 통과의례에서 찾는다면 이 텍스트는 죽은 은유로 쇠락한다.
▲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Signet Classics CD13, 1960. Cover by Milton Glaser. Source: www.flickr.com Make It Old. License: CC BY-NC-SA.
전환 : 명령하는 주인에서 돌봄받는 취약한 몸으로
‘마땅히 살아야 하는 대로 살지 않았음’에 대한 인정과 부인이 계속 반복되고, 그래서 죽음이 공허하게 지연될 때 이 히스테리적 회전에 멈춤을 가져온 건 하인 ‘게라심’의 돌보는 몸이다.
병이 낫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이미 상세히 묘사된 몸 상태의 악화, 통증, 고통을 통해 점증적으로 더 확실해진다. 한기가 엄습하고, 호흡이 멈추고, 입에서는 악취가 나고, 옆구리의 둔중하면서도 날카로운 통증은 결코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 아편이나 모르핀 주사조차 더이상 그의 통증을 가라앉히지 못한다.
그러나 주변인들은 그의 아픈 몸, 통증 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가엾이 여기며 돌보는 손길 없이 그는 죽음과 얼굴을 맞대고 단둘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는 돌봄이 몹시 필요한데, 그 돌봄을 전혀 받지 못하는 불쌍한 환자였다.
오랫동안 고통을 겪은 후 어느 순간 이반 일리치가 가장 원했던 것은 -그 점을 인정하는 것은 부끄러웠지만- 누구라도 자기를 병든 아이처럼 가련하게 여겨주는 것이었다. 그는 아이들을 어루만지고 달래듯, 자기를 어루만지고, 자기에게 입 맞추고, 자기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길 원했다.(같은 책, 47쪽)
그가 가장 간절히 원한 이 일을 해 준 사람이 있었다. 하인 게라심이었다. 통증으로 밤새 뒤척이는 이반 일리치의 무거운 다리를 자기 어깨 위에 올린 채로 밤을 같이 보내고, 간간이 이야기도 나누는 사람. 이 일을 “쉽게, 기꺼이, 간단하게 그리고 이반 일리치가 감동할 만큼 친절하게 수행”한 사람.
자신의 ‘창피한 몸’을 맡기는 게 부끄럽고 겸연쩍어 머뭇거리는 이반 일리치에게 그는 말한다.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이런 수고를 하는 게 그리 큰일은 아니지요.” 자기는 다름 아닌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일하는 것이고, 자기에게도 그런 때가 오면 누구든 자기를 위해 같은 일을 해 줄 것이기에, 이 일을 하는 게 힘들지 않다는 뜻을 명료하게 전한 거다.
두려움도 없고 거짓에 빠지지도 않는 그의 태도는 이렇듯 죽음의 보편성과 개별성을 동시에 포착하기에 가능하다. 게라심은 하인이라서 돌봄 노동을 하는 거지만, 동시에 죽음이라는 사건을 공유하는 한 사람으로서 윤리적 행위를 한다. 이로써 우리는 돌봄의 윤리로서의 은유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자아의 붕괴와 고립 속에서, 타자의 ‘얼굴’을 만나게 되는 보편적인 돌봄의 윤리로서의 은유 이야기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구원의 빛’은 초월적인 영적 깨달음이 아니라, 무엇보다 타자 윤리의 확보에서 출발한다. 45살에 죽을병에 걸려 결국 죽음에 도달하기까지 견딜 수 없는 통증과 처절한 외로움 속에 내던져진 이반 일리치는 다름 아닌 ‘하인’의 돌봄을 받음으로써, 농부 하인이 선물하는 돌봄과 (그 돌봄에 자양분을 대주는) 보편적 윤리를 경험함으로써, 자신도 타자의 윤리를 획득한다.
죽을병에 걸리기 전까지 그는 타자를 ‘만나지도’, 타자가 ‘되어보지도’ 못했다. 주체였고, 지위였고, 판단자였고, 규범의 집행자였고, 모든 것 속에서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유쾌한 교양 계급의 일원이었다. 완전히 의존적인 취약한 존재로서 죽어가는 이반 일리치는 바로 그 취약한 몸의 자리에서, 강요가 아닌 선물로 오는 ‘인류애’를 경험하고, 의무가 아닌 단순하고 당연한 행위로 오는 관계적 윤리를 경험한다.
이반 일리치가 궁극적으로 도달한 구원의 지평은, 신체적 붕괴와 사회적 가면의 붕괴가 가져온 충격과 파멸의 ‘불쌍한’ 처지에서 타자의 돌봄을 받고, 그로써 타자를 향한 윤리적 눈뜸이라는 존재론적 ‘전환’(transformation)을 이루고, 다시 그 힘으로 그동안 증오의 대상이었던 다른 타자를(특히 아내를) 용서하면서, 서로의 해방과 구원의 빛을 체험하는 돌봄 파장의 연쇄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순서는 단순한 심리 변화가 아니라 일종의 세속화된 ‘은총’의 구조에 가깝다. 자아의 붕괴와 고립 속에서 타자를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해 자기 중심성의 갱도에서 빠져나와 이제껏 보지 못했던 타자의 얼굴을 ‘보게’ 되는 사건이다.
나는 여기에서 일부러 ‘구원’과 ‘은총’이라는 용어를 쓴다. 완전히 세속화된 의미로, 그러나 가능한 그 의미의 폭과 깊이를 온전히 복원하고자 노력하면서. 먼지로 뒤덮인 그리고 어쩌면 쓰레기로 폐기 처분된 이 용어는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틀 너머에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고 소중한 걸 다시 느끼고 생각하고 추구하며 지켜낼 수 있게 할 거라 믿기 때문이다. 다정하고 상냥한 서로돌봄과 그것이 어루만지며 지켜내는 보드라운 삶 말이다.
어두운 방에서 소파의 등을 향해 누운 채 오로지 죽음과 얼굴을 맞대고 통증과 고통을 견디는 사람이 단지 이반 일리치 뿐일까. 서로가 서로를 돌보지 않고 ‘버려두는/버리는’ 죽음의 삶에서, 그야말로 죽음의 원인을 삶에서 찾을 수 있는 그런 삶으로 전환하는 건 구원이다.
이 구원을 가능케 하는 건 돌보는 몸이 건네는 은총이다. 이 문장들, 글 역시 은유다. 그렇다, 우리는 은유나 해석 없이는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 죽은 은유와 살아있는 은유를 잘 구분하는 밝은 관점, 시좌(視座)를 제대로 찾고 지키면 된다.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어떤 은유를 사용할 것인가. 우리는 어떤 이야기 속에서 아프고, 늙고, 죽어갈 것인가.
‘얼마나 훌륭하고 얼마나 간단한가!’
이반 일리치가 돌봄 윤리를 만나고 은총의 빛 속에서 내지른 경탄이다. 우리도 이처럼 배움의 열망으로 경탄하는 경험을 쌓아나갈 수 있다!
[필자 소개] 김영옥. 페미니스트 여성으로 늙어가고 있다. 교차성의 관점에서 노년기 말년성에 대해 질문하고 감각하고 쓰고 지우고 또 다시 쓰고 있다. ‘죽음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사유는 무엇을 하는가’에 관심이 있다. 이번 연재에서 죽음에 대한 사유는 명사적 죽음의 보편성과 동사적 죽음 경험의 특이성을 교차적으로 탐색하면서, 삶의 여러 국면을 고유한 문장으로 새롭게 낯설게 만나게 하리라 기대한다.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 『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 단독 저서와 『돌봄의 얼굴』, 『돌봄의 상상력』, 『돌봄과 인권』,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등 다수의 공저가 있다.
[일다] https://m.ildaro.com
그는 30대에 『세 죽음』을, 60대에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그로부터 약 10년 후인 70대에 『주인과 일꾼』을 썼다. 죽음에 관한 사유를 평생 멈추지 않았던 거다. 셋 모두 은유적 성격이 강한 이야기이지만, 특히 1886년에 집필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삶과 죽음 전체를 하나의 투명한 은유로 이야기함으로써, 삶과 신천지릴게임 죽음의 ‘실상’을 남김없이 치밀하게 포착해 내려는 시도다.
점점 더 독한 외로움 속에 홀로 내쳐진 채, 삶이 사라지는 어둡고 고통스러운 ‘파멸의 심연’으로 점점 더 깊이 ‘내려가는’ 내적 성찰과 고백은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영적 ‘구원’으로 비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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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프 톨스토이 저 『이반 일리치의 죽음』(윤우섭 역, 현대지성, 2023년)
풀리지 않는 삶과 죽음의 수수께끼
릴게임갓아직도 살아있는 은유로서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1인칭 죽음의 (서사) 불가능성을 최대한 극복하고자, (가능한 1인칭 화자의 시점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3인칭 화자의 시점에서 이반 일리치의 내면을 기술한다. 그의 아내와 자식들, 법원 동료들을 묘사할 때는 잠시 전지적 작가 시점이 활용되기도 하지만, 릴게임뜻 텍스트 전체를 관통하며 물들이는 건 이반 일리치의 질문, 느낌, 생각, 회한, 희망, 절망이다.
그는 아이에서 성인으로 성장하면서 거짓과 진실의 대당이 아니라, 소위 불쾌와 유쾌의 대당으로 삶을 조망하고 조율해 왔다. 나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저 질병의 한가운데에서 그는, 품위로 치장한 교양 계급의 위선과 진짜 유쾌했던, 기억하고 싶은 삶 알라딘릴게임 의 경험이라는 대당을 두고 저울의 가늠을 옮긴다.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이 주변인 모두의 거짓(된 삶)이었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영적 해방과 구원을 막아선 건 자신의 삶이 모조리 기만일 수는 없다는 믿음이었다. 진짜 유쾌했던, 그래서 기억하고 싶은 삶의 경험이 단 한 조각도 없을 수는 없다는 ‘전면적 자기 부정(否定)의 부인(否認)’이었다. ‘마땅히 살아야 하는 대로 살지 않았다는 최종적인 고백’은 그의 안에서 터져 나오지 못한 채/않은 채 그를 짓눌렀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은 끝났고, 죽음의 시간이다!
그런데 이게 뭐야?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된 거지? 그럴 수는 없다. 삶이 그렇게 무의미하고 역겨운 것이었을까? 그런데 만일 삶이 그렇게 역겹고 무의미하다면, 왜 죽어야 하고, 고통 속에 죽어야 하는 거지? 뭔가 잘못된 거다. '어쩌면 내가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살지 않은 건 아닐까?' [...]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했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지?' [...]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그는 속으로 되풀이했다. '여기가 그 법정이다! 그러나 나는 잘못이 없어!' 그는 화를 내며 소리 질렀다. '무엇 때문에?' [...] 왜 무엇 때문에 이 모든 두려움이 생긴 거지?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윤우섭 옮김, 현대지성 ebook, 57쪽)
그는 ‘이 고통과 죽음이 무엇 때문인지’ 묻고 또 묻는다. “그런데 만일 삶이 그렇게 역겹고 무의미하다면, 왜 죽어야 하고, 고통 속에 죽어야 하는 거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삶의 의미가 없이는 죽음이 가능할 수 없다고 몸부림치며 항거한다.
자연의 세계에서라면 생존 자체가 삶이고 의미다. 내부와 외부의 구별이 없는 이곳에서 살아있음은 이미 의미를 품고 있으며, 죽음 또한 그 안에 공생한다. 그러나 살아있음과 의미가 더이상 하나가 아닌 인간의 삶에서, 죽음의 가능성은 삶의 의미에 달려있다는 거다.
한 세기도 훨씬 더 전에 집필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죽은 은유가 아니라 살아있는 은유로 읽힐 수 있는 건, 다름 아닌 바로 이 질문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기존의 주요 ‘해석’이 그러하듯 예수의 십자가 부활이라든가, 속물적 삶을 내파하는 영적 깨달음이라는 통과의례에서 찾는다면 이 텍스트는 죽은 은유로 쇠락한다.
▲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Signet Classics CD13, 1960. Cover by Milton Glaser. Source: www.flickr.com Make It Old. License: CC BY-NC-SA.
전환 : 명령하는 주인에서 돌봄받는 취약한 몸으로
‘마땅히 살아야 하는 대로 살지 않았음’에 대한 인정과 부인이 계속 반복되고, 그래서 죽음이 공허하게 지연될 때 이 히스테리적 회전에 멈춤을 가져온 건 하인 ‘게라심’의 돌보는 몸이다.
병이 낫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이미 상세히 묘사된 몸 상태의 악화, 통증, 고통을 통해 점증적으로 더 확실해진다. 한기가 엄습하고, 호흡이 멈추고, 입에서는 악취가 나고, 옆구리의 둔중하면서도 날카로운 통증은 결코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 아편이나 모르핀 주사조차 더이상 그의 통증을 가라앉히지 못한다.
그러나 주변인들은 그의 아픈 몸, 통증 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가엾이 여기며 돌보는 손길 없이 그는 죽음과 얼굴을 맞대고 단둘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는 돌봄이 몹시 필요한데, 그 돌봄을 전혀 받지 못하는 불쌍한 환자였다.
오랫동안 고통을 겪은 후 어느 순간 이반 일리치가 가장 원했던 것은 -그 점을 인정하는 것은 부끄러웠지만- 누구라도 자기를 병든 아이처럼 가련하게 여겨주는 것이었다. 그는 아이들을 어루만지고 달래듯, 자기를 어루만지고, 자기에게 입 맞추고, 자기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길 원했다.(같은 책, 47쪽)
그가 가장 간절히 원한 이 일을 해 준 사람이 있었다. 하인 게라심이었다. 통증으로 밤새 뒤척이는 이반 일리치의 무거운 다리를 자기 어깨 위에 올린 채로 밤을 같이 보내고, 간간이 이야기도 나누는 사람. 이 일을 “쉽게, 기꺼이, 간단하게 그리고 이반 일리치가 감동할 만큼 친절하게 수행”한 사람.
자신의 ‘창피한 몸’을 맡기는 게 부끄럽고 겸연쩍어 머뭇거리는 이반 일리치에게 그는 말한다.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이런 수고를 하는 게 그리 큰일은 아니지요.” 자기는 다름 아닌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일하는 것이고, 자기에게도 그런 때가 오면 누구든 자기를 위해 같은 일을 해 줄 것이기에, 이 일을 하는 게 힘들지 않다는 뜻을 명료하게 전한 거다.
두려움도 없고 거짓에 빠지지도 않는 그의 태도는 이렇듯 죽음의 보편성과 개별성을 동시에 포착하기에 가능하다. 게라심은 하인이라서 돌봄 노동을 하는 거지만, 동시에 죽음이라는 사건을 공유하는 한 사람으로서 윤리적 행위를 한다. 이로써 우리는 돌봄의 윤리로서의 은유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자아의 붕괴와 고립 속에서, 타자의 ‘얼굴’을 만나게 되는 보편적인 돌봄의 윤리로서의 은유 이야기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구원의 빛’은 초월적인 영적 깨달음이 아니라, 무엇보다 타자 윤리의 확보에서 출발한다. 45살에 죽을병에 걸려 결국 죽음에 도달하기까지 견딜 수 없는 통증과 처절한 외로움 속에 내던져진 이반 일리치는 다름 아닌 ‘하인’의 돌봄을 받음으로써, 농부 하인이 선물하는 돌봄과 (그 돌봄에 자양분을 대주는) 보편적 윤리를 경험함으로써, 자신도 타자의 윤리를 획득한다.
죽을병에 걸리기 전까지 그는 타자를 ‘만나지도’, 타자가 ‘되어보지도’ 못했다. 주체였고, 지위였고, 판단자였고, 규범의 집행자였고, 모든 것 속에서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유쾌한 교양 계급의 일원이었다. 완전히 의존적인 취약한 존재로서 죽어가는 이반 일리치는 바로 그 취약한 몸의 자리에서, 강요가 아닌 선물로 오는 ‘인류애’를 경험하고, 의무가 아닌 단순하고 당연한 행위로 오는 관계적 윤리를 경험한다.
이반 일리치가 궁극적으로 도달한 구원의 지평은, 신체적 붕괴와 사회적 가면의 붕괴가 가져온 충격과 파멸의 ‘불쌍한’ 처지에서 타자의 돌봄을 받고, 그로써 타자를 향한 윤리적 눈뜸이라는 존재론적 ‘전환’(transformation)을 이루고, 다시 그 힘으로 그동안 증오의 대상이었던 다른 타자를(특히 아내를) 용서하면서, 서로의 해방과 구원의 빛을 체험하는 돌봄 파장의 연쇄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순서는 단순한 심리 변화가 아니라 일종의 세속화된 ‘은총’의 구조에 가깝다. 자아의 붕괴와 고립 속에서 타자를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해 자기 중심성의 갱도에서 빠져나와 이제껏 보지 못했던 타자의 얼굴을 ‘보게’ 되는 사건이다.
나는 여기에서 일부러 ‘구원’과 ‘은총’이라는 용어를 쓴다. 완전히 세속화된 의미로, 그러나 가능한 그 의미의 폭과 깊이를 온전히 복원하고자 노력하면서. 먼지로 뒤덮인 그리고 어쩌면 쓰레기로 폐기 처분된 이 용어는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틀 너머에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고 소중한 걸 다시 느끼고 생각하고 추구하며 지켜낼 수 있게 할 거라 믿기 때문이다. 다정하고 상냥한 서로돌봄과 그것이 어루만지며 지켜내는 보드라운 삶 말이다.
어두운 방에서 소파의 등을 향해 누운 채 오로지 죽음과 얼굴을 맞대고 통증과 고통을 견디는 사람이 단지 이반 일리치 뿐일까. 서로가 서로를 돌보지 않고 ‘버려두는/버리는’ 죽음의 삶에서, 그야말로 죽음의 원인을 삶에서 찾을 수 있는 그런 삶으로 전환하는 건 구원이다.
이 구원을 가능케 하는 건 돌보는 몸이 건네는 은총이다. 이 문장들, 글 역시 은유다. 그렇다, 우리는 은유나 해석 없이는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 죽은 은유와 살아있는 은유를 잘 구분하는 밝은 관점, 시좌(視座)를 제대로 찾고 지키면 된다.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어떤 은유를 사용할 것인가. 우리는 어떤 이야기 속에서 아프고, 늙고, 죽어갈 것인가.
‘얼마나 훌륭하고 얼마나 간단한가!’
이반 일리치가 돌봄 윤리를 만나고 은총의 빛 속에서 내지른 경탄이다. 우리도 이처럼 배움의 열망으로 경탄하는 경험을 쌓아나갈 수 있다!
[필자 소개] 김영옥. 페미니스트 여성으로 늙어가고 있다. 교차성의 관점에서 노년기 말년성에 대해 질문하고 감각하고 쓰고 지우고 또 다시 쓰고 있다. ‘죽음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사유는 무엇을 하는가’에 관심이 있다. 이번 연재에서 죽음에 대한 사유는 명사적 죽음의 보편성과 동사적 죽음 경험의 특이성을 교차적으로 탐색하면서, 삶의 여러 국면을 고유한 문장으로 새롭게 낯설게 만나게 하리라 기대한다.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 『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 단독 저서와 『돌봄의 얼굴』, 『돌봄의 상상력』, 『돌봄과 인권』,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등 다수의 공저가 있다.
[일다] https://m.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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