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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강보한
등록일: 25-09-27 07:31
탈북민 하신아씨가 지난 19일 서울 강서구 행복한나눔 등촌점에서 미혼모가 만든 소셜 상품을 설명하고 있다.
정민지(가명·41)씨는 미혼모다. 2017년 출산을 앞두고 파혼했다. 2017년 아들을 출산한 그는 생계를 위해 작은 공방을 열었다. 가죽으로 자동차 열쇠 케이스나 책갈피, 카드지갑을 만들고 그 방법을 가르쳐 주는 곳이었다. 한동안 매출이 올랐다. 코로나19가 퍼지기 전까지.
코로나가 오래 가지 않을 거란 얘기에 2020년 말 공방을 확장했지만, 예상과 달리 직격탄을 맞으며 매출은 곤두박질쳤다. 2021년 겨울엔 아들이 유일하게 다니던 미술학원도 끊어야 했다. 다섯 살이었던 아들에겐 “겨울 방학 중엔 추우니까 집에서 쉬자”고 한솔CSN 주식
에둘러 말했다. 임대료와 공과금 고지서를 붙잡고 한숨짓는 날이 2년 넘게 이어졌다. 자신을 탓하며 공황 증세까지 겪었다. 그런 그에게 지난 5월, 기적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최근 기자가 찾은 서울 강서구의 한 상가 1층. 흰색과 녹색 인테리어로 꾸며진 가게엔 브랜드 의류부터 생활용품, 수제 가죽 소품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정바다이야기PC버전
씨가 5월부터 납품한 가죽 소품도 이곳에 진열돼 있었다.
이곳은 국제구호개발 NGO 희망친구 기아대책(회장 최창남)의 사회적기업 ‘행복한나눔’이다. 진열된 상품 90%는 대기업과 개인이 기증한 재고 상품이고 나머지 10%는 또 다른 사회적 기업들과 기아대책 해외 자립지원 사업장, 미혼모 사업가 6명이 만든 ‘소셜 상품’이다. 매장 한편에는현대산업 주식
스리랑카에서 만든 코코넛 비누도 있었다. 기아대책 해외 사업장에서 여성과 청년이 제작한 자립공동체 상품이다.
직원 중엔 취약계층이 적지 않다. 등촌점에서 일하는 하신아(26)씨도 그렇다. 2016년 홀로 탈북한 그는 지난 2월 대학을 졸업한 뒤 남북하나재단의 소개로 이곳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전국 13곳 매장엔 하씨 같은 탈북민이 6주식영웅문
명 더 있고 장애인, 이주 배경, 경력단절 여성 등을 합쳐 24명이 일하고 있다. 행복한나눔 전체 직원(54명) 중 절반에 달한다.
생명 창고에서 시작된 돌봄 허브
황금성배당줄
미혼모 사업가들이 행복한나눔에 납품하는 공방 소품들.
행복한나눔의 시작은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기아대책은 ‘한 생명 살리기’라는 비전을 위해 국내 최초 나눔가게 ‘3S 생명 창고’를 시작했다. 나누고(Share), 섬기고(Serve), 살린다(Save)는 정신으로 시작된 작은 가게는 2008년 재단법인으로 독립하며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았다.
행복한나눔의 비전은 ‘비즈니스를 통해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의 자립과 행복한 삶을 만들기’다. 이곳의 소셜 상품 판매 연 매출은 3억2000만원인데, 이중 2억원 정도가 취약 계층 급여로 사용된다. 행복한나눔은 긴급구호나 국내 취약계층 지원 목적으로 상품을 재분배하기도 한다. 지난 1월부터 8월까지 각각 8억원, 8500만원의 현물과 현금을 후원했다.
한명삼 행복한나눔 본부장은 “조그마한 나눔 가게에서 시작된 행복한나눔이 취약계층의 자립을 돕고 사회에 기여하는 곳으로 성장한 배경엔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고 했다. 이어 “행복한나눔은 대기업, 사회적 기업, 취약계층이 서로 돌봄의 가치를 구현하는 곳”이라며 “매장이 대단히 많진 않지만, 단순한 상점을 넘어 지역 내 나눔 문화 거점이 되고 지역사회 돌봄의 허브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돌봄에서 자립으로
미혼모인 정씨는 행복한나눔이 새로운 판로를 넘어 삶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자 활력소라고 강조했다. 그는 “행복한나눔에 입점한 뒤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며 “고정 수입이 생기면서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고 했다.
아홉 살이 된 정씨 아들도 얼마 전부터 다시 미술학원에 다니고 있다. “태권도를 배우고 싶다”는 아들의 말도 흔쾌히 들어줄 수 있게 됐다. 정씨는 “전엔 하나뿐인 자식인데 학원 하나 못 보내준다는 사실에 괜히 주눅이 들었다”며 “경제적 안정뿐 아니라 엄마로서 자신감도 회복됐다”고 했다.
탈북민 하씨에게도 행복한나눔에서 일한 지 반년 만에 적잖은 변화가 있었다. 그는 이날 손님들이 둘러 보고 간 옷가지를 정리하며 이렇게 말했다.
“남한에 처음 왔을 때 주변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한국은 ‘더불어 사는 민주사회’라고. 막상 살아보니 그렇지 않았어요. 고등학교부터 대학을 다니면서 느낀 건 한국은 무한 경쟁 사회라는 점이었어요. 버릇처럼 뒷담화를 하는 분들도 많고요. 탈북민은 사회생활 석 달도 못 버틸 거란 얘기도 들었어요.”
하지만 행복한나눔에선 정반대 경험을 했다. 하씨는 “처음 일이 서툴 때 매니저님들이 ‘모르는 건 알 때까지 몇 번이고 물어봐도 괜찮다’고 격려해주셨다”며 “제가 탈북민이라는 걸 아시는 손님들이 ‘한국에 참 잘 왔다’고 말씀해주시기도 했다”고 했다. 등촌점에서 요즘 매니저 업무를 배우는 하씨는 올해 안에 서울 방배점으로 자리를 옮겨 부매니저로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그는 “저도 취약계층이지만, 이곳에서 일하면 미혼모나 장애인 등 어려운 분들을 돕는 것 같아서 참 감사하다”고 웃었다.
글·사진=이현성 기자 sag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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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지(가명·41)씨는 미혼모다. 2017년 출산을 앞두고 파혼했다. 2017년 아들을 출산한 그는 생계를 위해 작은 공방을 열었다. 가죽으로 자동차 열쇠 케이스나 책갈피, 카드지갑을 만들고 그 방법을 가르쳐 주는 곳이었다. 한동안 매출이 올랐다. 코로나19가 퍼지기 전까지.
코로나가 오래 가지 않을 거란 얘기에 2020년 말 공방을 확장했지만, 예상과 달리 직격탄을 맞으며 매출은 곤두박질쳤다. 2021년 겨울엔 아들이 유일하게 다니던 미술학원도 끊어야 했다. 다섯 살이었던 아들에겐 “겨울 방학 중엔 추우니까 집에서 쉬자”고 한솔CSN 주식
에둘러 말했다. 임대료와 공과금 고지서를 붙잡고 한숨짓는 날이 2년 넘게 이어졌다. 자신을 탓하며 공황 증세까지 겪었다. 그런 그에게 지난 5월, 기적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최근 기자가 찾은 서울 강서구의 한 상가 1층. 흰색과 녹색 인테리어로 꾸며진 가게엔 브랜드 의류부터 생활용품, 수제 가죽 소품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정바다이야기PC버전
씨가 5월부터 납품한 가죽 소품도 이곳에 진열돼 있었다.
이곳은 국제구호개발 NGO 희망친구 기아대책(회장 최창남)의 사회적기업 ‘행복한나눔’이다. 진열된 상품 90%는 대기업과 개인이 기증한 재고 상품이고 나머지 10%는 또 다른 사회적 기업들과 기아대책 해외 자립지원 사업장, 미혼모 사업가 6명이 만든 ‘소셜 상품’이다. 매장 한편에는현대산업 주식
스리랑카에서 만든 코코넛 비누도 있었다. 기아대책 해외 사업장에서 여성과 청년이 제작한 자립공동체 상품이다.
직원 중엔 취약계층이 적지 않다. 등촌점에서 일하는 하신아(26)씨도 그렇다. 2016년 홀로 탈북한 그는 지난 2월 대학을 졸업한 뒤 남북하나재단의 소개로 이곳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전국 13곳 매장엔 하씨 같은 탈북민이 6주식영웅문
명 더 있고 장애인, 이주 배경, 경력단절 여성 등을 합쳐 24명이 일하고 있다. 행복한나눔 전체 직원(54명) 중 절반에 달한다.
생명 창고에서 시작된 돌봄 허브
황금성배당줄
미혼모 사업가들이 행복한나눔에 납품하는 공방 소품들.
행복한나눔의 시작은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기아대책은 ‘한 생명 살리기’라는 비전을 위해 국내 최초 나눔가게 ‘3S 생명 창고’를 시작했다. 나누고(Share), 섬기고(Serve), 살린다(Save)는 정신으로 시작된 작은 가게는 2008년 재단법인으로 독립하며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았다.
행복한나눔의 비전은 ‘비즈니스를 통해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의 자립과 행복한 삶을 만들기’다. 이곳의 소셜 상품 판매 연 매출은 3억2000만원인데, 이중 2억원 정도가 취약 계층 급여로 사용된다. 행복한나눔은 긴급구호나 국내 취약계층 지원 목적으로 상품을 재분배하기도 한다. 지난 1월부터 8월까지 각각 8억원, 8500만원의 현물과 현금을 후원했다.
한명삼 행복한나눔 본부장은 “조그마한 나눔 가게에서 시작된 행복한나눔이 취약계층의 자립을 돕고 사회에 기여하는 곳으로 성장한 배경엔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고 했다. 이어 “행복한나눔은 대기업, 사회적 기업, 취약계층이 서로 돌봄의 가치를 구현하는 곳”이라며 “매장이 대단히 많진 않지만, 단순한 상점을 넘어 지역 내 나눔 문화 거점이 되고 지역사회 돌봄의 허브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돌봄에서 자립으로
미혼모인 정씨는 행복한나눔이 새로운 판로를 넘어 삶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자 활력소라고 강조했다. 그는 “행복한나눔에 입점한 뒤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며 “고정 수입이 생기면서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고 했다.
아홉 살이 된 정씨 아들도 얼마 전부터 다시 미술학원에 다니고 있다. “태권도를 배우고 싶다”는 아들의 말도 흔쾌히 들어줄 수 있게 됐다. 정씨는 “전엔 하나뿐인 자식인데 학원 하나 못 보내준다는 사실에 괜히 주눅이 들었다”며 “경제적 안정뿐 아니라 엄마로서 자신감도 회복됐다”고 했다.
탈북민 하씨에게도 행복한나눔에서 일한 지 반년 만에 적잖은 변화가 있었다. 그는 이날 손님들이 둘러 보고 간 옷가지를 정리하며 이렇게 말했다.
“남한에 처음 왔을 때 주변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한국은 ‘더불어 사는 민주사회’라고. 막상 살아보니 그렇지 않았어요. 고등학교부터 대학을 다니면서 느낀 건 한국은 무한 경쟁 사회라는 점이었어요. 버릇처럼 뒷담화를 하는 분들도 많고요. 탈북민은 사회생활 석 달도 못 버틸 거란 얘기도 들었어요.”
하지만 행복한나눔에선 정반대 경험을 했다. 하씨는 “처음 일이 서툴 때 매니저님들이 ‘모르는 건 알 때까지 몇 번이고 물어봐도 괜찮다’고 격려해주셨다”며 “제가 탈북민이라는 걸 아시는 손님들이 ‘한국에 참 잘 왔다’고 말씀해주시기도 했다”고 했다. 등촌점에서 요즘 매니저 업무를 배우는 하씨는 올해 안에 서울 방배점으로 자리를 옮겨 부매니저로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그는 “저도 취약계층이지만, 이곳에서 일하면 미혼모나 장애인 등 어려운 분들을 돕는 것 같아서 참 감사하다”고 웃었다.
글·사진=이현성 기자 sag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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