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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강보한
등록일: 26-01-20 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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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교육자·사상인·신앙인 다양한 얼굴 가진 31세 청년 안중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1905년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 4년 후인 1909년 10월 26일. 인파로 가득한 하얼빈역에서 총성이 울렸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선봉 이토 히로부미를 쓰러뜨린 하얼빈 의거죠. 하얼빈 의거는 일제에 맞선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드러내고, 동양평화를 짓밟은 침략자를 응징한 대표적인 반제국주의 항거입니다. 우리가 오늘날까지 안중근이란 이름 석 자를 기억하고 기리는 이유죠. 안중근 의사는 왜 하얼빈 의거를 계획한 걸까요. 또 하얼빈 의거 알라딘릴게임 이전에 안중근 의사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소중 학생기자단이 우리가 잘 몰랐던 안중근 의사의 다양한 면모를 알아보기로 했어요.
김민영 학생기자·황지인 학생모델·정하은 학생기자(왼쪽부터)가 안중근 의사의 삶을 살폈다.
바다이야기게임2서울시 중구 소월로에는 민족정기를 탄압하기 위해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에 1970년 건립·개관한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있어요. 안중근 의사에 관한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고, 그 사상과 정신을 널리 보급하는 곳이죠. 이주화 학예부장이 안중근 의사의 대형 좌상 앞에서 김민영·정하은 학생기자와 황지인 학생모델을 맞이했죠. 우리는 하얼빈 의 바다이야기온라인 거 전후 안중근 의사 행적은 교과서나 영화·뮤지컬·소설 등을 통해 잘 알지만, 독립운동가로 활약하기 전 안중근 의사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상세히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먼저 안중근 의사가 태어난 시대에 나라 안팎으로 무슨 일이 있었으며, 그의 어린 시절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아봅시다.
하얼빈 의거 이전 안중근 의사의 삶 안중근 의사는 릴게임갓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부친 안태훈 진사와 모친 조마리아 여사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했어요. 태어날 때 배와 가슴에 점이 7개가 있어서 아명을 응칠(應七)이라 불렀으며, 어려서부터 한학(漢學)과 말타기·사격술을 익혔죠.
"안중근 의사 출생 전후는 한국이 전근대에서 근대로 전환하던 시기입니다. 당시 조선은 일본군함 운요호의 바다이야기모바일 강화도 침범 사건으로 불평등하게 체결된 강화도조약(1876년), 신식 군인 우대 정책에 불만을 품은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임오군란(1882년), 조선을 근대국가로 만들고자 급진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1884년), 청과 일본이 동학농민군 봉기를 빌미로 벌인 청일전쟁(1894년), 일제가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1895년) 등으로 나라 안팎이 혼란스러웠죠." 당시 조선은 자력으로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이루려 했으나, 역량 부족과 외세의 압력으로 실패했어요. 안중근 의사는 이렇게 500년 역사를 가진 조선이 기울어져 가던 시기에 태어나고 성장한 겁니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안중근 의사가 태어나고 성장한 시기 국내외 정세에 대해 살폈다.
민영 학생기자가 "안중근 의사를 지칭할 때 '도마' 안중근이라고도 하는데, 이 도마가 세례명 토마스(Thomas)를 뜻한다고 들었어요"라고 말했죠. "맞아요. 안중근 의사는 1897년 부친을 비롯한 일가친척들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해 프랑스 출신 빌렘(Wilhelm·洪錫九)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토마스(도마)라는 세례명을 갖게 됐어요. 안중근 의사는 빌렘 신부와 함께 황해도 여러 지역에서 선교활동과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을 펼쳤어요. 빌렘 신부는 교리뿐만 아니라 서양의 문물과 사상, 국제정세 등을 알려주며 안중근 의사가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혀줬죠." 전시실에는 안중근 의사가 빌렘 신부에게 1908년 보낸 엽서도 있었어요.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1세로 순국할 때까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기에 흔히 그의 이름 앞에 도마라는 세례명이 함께하죠.
많은 사람이 안중근 의사를 하얼빈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로 기억하지만, 사실 안중근 의사는 국내에서 구국 운동을 벌이던 교육자로서의 삶을 먼저 시작했어요. 일제는 한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하고,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죠. 1906년에는 일제의 식민 통치 준비기구인 통감부가 설치됐고,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면서 나라의 모든 실권은 이토 히로부미의 수중으로 들어갔어요.
이주화 학예부장이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독립투사의 면모 외에도 안중근 의사의 다양한 모습을 설명했다.
대한제국이 허울만 남은 상황에서 안중근 의사는 나라를 구할 방법을 찾기 위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고, 이곳에서 르 각(Le Gac·郭元良) 신부를 만났죠. 르 각 신부는 구국 방법을 찾던 안중근에게 "국가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서는 교육의 진흥이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했어요. 이에 안중근 의사는 국내로 돌아와 1906년 평안남도 진남포에 중등학교인 삼흥학교를 세우고, 초등학교인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하려 했죠. 국제 감각의 중요성을 깨달은 안중근 의사는 삼흥학교 학생들이 외국어를 배우도록 했어요.
하지만 일제는 더욱 노골적으로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했죠. 일제는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 특사를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로 폐위시키고, 같은 해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도 해산시켰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안중근 의사는 국내 구국운동의 한계를 깨닫고 더욱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러시아 연해주로 향했죠.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보던 하은 학생기자가 "앞서 본 안중근 의사 대형 좌상도 그렇고, 역사 교과서 사진 속 안중근 의사는 왼손 약지의 일부분이 잘려나간 모습이에요.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라고 궁금해했죠.
안중근 의사는 1909년 왼손 약지 마디를 잘라 혈서를 쓰며 조국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왼손 약지 절단은 의병 재기를 다짐하기 위한 애국결사의 결과였어요. 안중근 의사는 1908년 6월 연해주에서 100여 명의 의군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며 승전을 거듭했어요. 일제강점기에 항일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외국에서 군대를 양성해 국내로 진격하는 형식으로 진행된 작전을 국내진공작전이라 해요. 이때 안중근 의사는 포로로 잡은 일본군을 당시 국제법인 '만국공법'에 따라 석방했는데, 이 일로 의병부대의 위치가 노출됐어요. 결국 안중근 의사가 이끈 의병부대는 일본군 본대의 습격을 받아 크게 패했죠. 국내진공작전이 수포로 돌아간 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초 연해주에서 11명의 동지와 함께 동의단지회를 조직했어요. 이들은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의 유지를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하며 왼손 약지 마디를 잘라 '대한독립' 혈서를 썼죠."
소중 학생기자단은 동의단지회 취지문을 살펴봤습니다. 1895년에 고종이 일본과 친일 내각의 압력을 받아 백성들에게 상투와 머리카락을 자르라고 내린 단발령에 전국적으로 거센 반발이 있었을 만큼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는 당시 우리 민족의 공통된 정서였습니다. '작은 털, 피부 하나까지 몸이란 부모님이 주신 것이니 상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건데요. 동의단지회는 '우리가 손가락 하나씩 끊음은 조그마한 일'라며 결의를 다졌죠. 구국을 위한 이들의 결의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에요.
안중근 의사가 1908년 빌렘 신부에게 근황을 알린 엽서.
한국침략·제국주의 선봉 이토 히로부미 처단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는 일본의 초대 총리대신과 한국의 국정 전반을 사실상 장악했던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초프와 동북아 정책을 협의하고자 북만주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한국 병탄의 기초를 구축한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을 처단할 절호의 기회로 본 안중근 의사는 우덕순·조도선과 함께 의거 계획을 세웠죠.
10월 22일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 의사는 그곳 한인회장 김성백의 집에 머물며 의거 결의를 담은 '장부가'를 지었어요. "분개함이 한 번 뻗치니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쥐도적 이등이여 그 목숨 어찌 사람 목숨인고" 등의 구절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향한 굳은 결의를 엿볼 수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단지동맹 당시 그린 혈서 태극기를 담은 엽서.
거사 당일인 10월 26일, 안중근 의사 일행은 의거의 확실한 성사를 위해 두 개의 조로 나눠 대기했어요. 채가구역에서는 우덕순·조도선이, 하얼빈역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의거를 결행하기로 했죠. 채가구역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탄 특별열차를 기다리던 우덕순과 조도선은 실패했지만, 하얼빈역에서 기다리던 안중근 의사가 의거에 성공했어요.
소중 학생기자단은 하얼빈 의거 당시를 재현한 영상을 통해 당시 상황과 분위기를 느껴보기로 했죠. 당시 하얼빈역은 일장기를 높이 들고 이토 히로부미를 반기는 일본인들의 함성과 군악대의 연주 소리로 요란했어요. 러시아 재무대신의 영접을 받은 이토 히로부미가 기차에서 내려 의장대를 사열하고 각국 영사단과 악수하고 되돌아오는 것을 지켜본 안중근 의사는 오전 9시 30분, 권총의 방아쇠를 당겨 이토 히로부미에게 세 발을 명중시켰어요.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짓밟은 침략자 이토 히로부미는 이렇게 안중근 의사의 손에 최후를 맞았습니다.
정하은 학생기자·황지인 학생모델·김민영 학생기자가 안중근 의사의 생애와 사상을 알아봤다.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 『안응칠역사』에는 하얼빈 의거 당시 안중근 의사의 심경이 드러납니다. "러시아 일반 관리들이 호위하고 오는 중에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가진 한 조그마한 늙은이가 이같이 염치없이 감히 천지 사이를 횡행하고 다니는가. ‘저것이 필시 이등 노적일 것이다’ 하고 곧 단총을 뽑아 들고 그 오른쪽을 향해서 4발을 쏜 다음, 생각해 보니 십분 의아심이 머릿속에서 일어났다. 내가 본시 이토의 모습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만일 한 번 잘못 쏜다면 큰일이 낭패가 되는 것이라, 그래서 다시 뒤쪽을 향해서, 일본인 단체 가운데서 가장 의젓해 보이는, 앞서가는 자를 새로 목표하고 3발을 이어 쏜 뒤에 또다시 생각하니, 만일 무죄한 사람을 잘못 쏘았다 하면 일은 반드시 불미할 것이라 잠깐 정지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헌병이 와서 붙잡히니 그때가 바로 1909년 음력 9월 13일 상오 9시 반쯤이었다. 그때 나는 곧 하늘을 향하여 큰 소리로 ‘대한만세’를 세 번 부른 다음, 정거장 헌병 분파소로 붙잡혀 들어갔다."
의거 현장에서 체포된 안중근 의사는 그날 저녁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으로 신병이 인도됐고, 11월 3일 뤼순감옥으로 압송돼 이듬해 3월 26일 순국할 때까지 144일간 수감됐죠. 일제는 심문과 재판을 진행했지만, 일본 외무성은 "안중근에게 극형을 내리라"는 사전 지령을 내리는 등 재판 결과가 나오기 전부터 안 의사를 처형할 방침이었습니다.
하얼빈 의거는 큰 반향을 일으켰고, 국내외 각지에서 안중근 의사 구명운동과 재판에 대비한 의연금 모금 운동도 벌어졌죠. 그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안중근 의사 공판 방청권을 구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일제는 안중근 의사의 한국인이나 외국인 변호사의 선임을 막고 일본인 관선 변호사만 허용하는 등 불법 재판을 강행했죠.
안중근 의사 공판 방청권.
1910년 2월 7일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형사 법정에서 첫 공판이 열렸어요. 안중근 의사는 재판정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 15개 조"를 당당히 밝혔죠. 소중 학생기자단은 전시실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 15개 조를 적은 문서를 살폈습니다. 여기에는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고종 강제 폐위,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 외에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동양 평화를 파괴한 죄 등이 포함됐어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해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의 파괴자라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죠.
일제는 하얼빈 의거를 이토 히로부미의 한국에 대한 통치 정책을 오해하여 저지른 개인적인 살인 행위로 몰아가려 했어요. 이에 맞서 안중근 의사는 "내가 이토를 죽인 것은 한국독립투쟁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도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된 때문이다. 이토를 살해한 후 나는 국제재판에 나가서 이토의 죄악을 일일이 진술하고,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세계에 알릴 생각이었다"라는 대의를 밝히며 대한제국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하다 암살을 결행한 것이라 주장하며 자신을 만국공법에 입각한 전쟁 포로로 대우해줄 것을 요구했죠.
소중 학생기자단이 이주화 학예부장과 함께 안중근 의사의 생애 및 업적과 관련된 여러 유물을 둘러봤다.
그러나 일본인들로 구성된 재판부는 일본 외무성의 사전 지령에 따라 1910년 2월 14일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어요. 안중근 의사는 "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는가?"라고 반문하며 의연한 모습을 보였죠.
사상가이자 문장가이기도 했던 안중근 의사는 뤼순감옥에서 자서전인 『안응칠역사』와 한국의 독립과 인류의 평화를 위한 『동양평화론』(미완성)을 비롯한 여러 유묵을 남겼어요. 『안응칠역사』는 1879년부터 1910년까지 30년 7개월간 자신의 생애와 활동을 기술한 겁니다. 사본만 전하지만, 안중근 의사의 나라 사랑 정신과 인간으로서의 담대함과 위대함을 엿볼 수 있죠.
"『안응칠역사』 사본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지 60년 후 세상에 알려졌어요. 1969년 일본 도쿄의 간다 고서점에서 도쿄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 원장이, 1978년에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고미술상을 경영하던 와타나베 쇼시로가 각각의 사본을 발견했죠. 이듬해인 1979년에는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등사(복사)합본이 세상에 드러났는데 여러분이 앞서 살펴본 안중근 의사의 어린 시절과 교육자로서의 삶 등은 『안응칠역사』를 기반으로 한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의 조부모님 세대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이전의 삶에 대해서는 잘 모르실 수도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집필한 자서전 『안응칠역사』.
『동양평화론』은 안중근 의사가 열흘 동안 작성한 미완성의 논문이에요. 총 다섯 개의 장 중에서 제3~5장 부분을 완성하지 못한 채 순국했죠.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동양평화론』의 일부와 당시 뤼순 고등법원장과의 면담에서 밝힌 소견 등을 통해 안중근 의사가 세상에 남기고 싶었던 동양평화론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어요. 뤼순을 중립지대로 정하여 한·중·일 삼국의 평화기구를 두고, 삼국 공동 화폐를 사용하고 은행을 설치하며, 삼국 청년들로 공동 군대를 만들고 상대국 언어를 습득시켜 우의를 다지게 하자는 것이죠.
"오늘날 동아시아는 북한의 핵무기,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 등으로 정세가 불안하죠. 또 지구 반대편에서는 미군이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을 생포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살던 110여 년 전에도 국제 사회 정세는 매우 불안했어요. 영국 등 제국주의 열강이 지구의 반을 다스리며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죠. 안중근 의사는 어떻게 하면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올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했어요."
흔히 독서 관련해서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을 텐데요. 이 문장은 안중근 의사가 뤼순 옥중에서 순국하기 직전까지 남긴 200여 점의 유묵(遺墨) 중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을 뜻합니다. 소중 학생기자단은 안중근 의사가 남긴 여러 유묵을 살폈어요. 그중 31점이 국가 보물로 지정돼 있죠.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는 내용인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 독립에 대한 의지와 염원이 집약된 유묵인 '독립(獨立)' 등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있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여 전 세계 제국주의 세력에 경종을 울린 안중근 의사는 옥중에서 동포·어머니·아내와 빌렘 신부 등에게 유서를 남겼어요.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기 전 '일제에 항소하지 말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뜻을 전하기도 했죠.
1910년 3월 26일 어머니가 보내준 흰색 명주 한복을 입은 안중근 의사는 "내가 한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동양 평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 한·일 양국이 협력하여 동양 평화가 이루어지길 바랄 뿐이다"라는 마지막 당부를 남기고 간수에 이끌려 교수대에 올라 순국했습니다.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뤼순 옥중에서 순국하기 직전까지 남긴 여러 유묵도 살펴볼 수 있다.
안중근 의사가 유언을 남기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던 지인 학생모델이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어디에 있나요"라고 질문했어요. 이 학예부장은 소중 학생기자단을 한 장의 전보 앞으로 데려갔습니다. 여기에는 '안중근 사형 집행 끝'이라는 짧은 문장만 적혀있었어요.
"보통 사형을 집행하고 나면 이 사람을 어디에 묻었는지, 누구에게 시신을 인도했는지 등을 전보에 적습니다. 그런데 이 전보에는 안중근 의사가 묻힌 장소가 표기돼 있지 않아요. 안중근 의사의 묘소가 한국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 한 일제가 정근·공근 두 동생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시신을 인도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안중근 의사는 생전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옮겨 묻어달라'고 요청했지만, 안 의사의 유해는 비밀리에 뤼순감옥 공동묘지에 묻혔고 지금까지도 정확한 위치를 몰라 고국으로 송환되지 못하고 있어요."
하얼빈 의거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강점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안중근 의사의 투지와 구국열은 이후 강우규·김상옥·나석주·이봉창·윤봉길 등 후대의 여러 독립운동가에게 계승됐어요. 백범 김구는 안중근 의사를 '한국 독립운동의 지주'로 받들기도 했죠.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집필한 자서전 『안응칠역사』.
그의 가문 역시 안중근 의사의 신념을 이어갔습니다.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임시정부 경제후원회와 상하이 재류동포 정부경제후원회에서 활동하며, 가문 인사 및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죠. 또 안중근 의사의 동생 공근·정근 형제는 임시정부·한인애국단 등에서 활약했으며, 사촌 안명근도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세우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했어요.
평생을 구국에 헌신해 교육자·독립운동가로 살았던 안중근 의사의 삶은 향후 일제에 맞선 한민족 독립운동의 이정표가 됐고, 그가 저서·유묵 등을 통해 남긴 사상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어요.
서울 남산에 있는 안중근의사기념관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에 안중근 의사의 사상과 정신을 보급하기 위해 1970년 건립됐다.
동행취재=김민영(충북 충북여중 1)·정하은(서울 노원중 1) 학생기자·황지인(서울 봉은초 6) 학생모델
■ 안중근 의사 연보
「 구국에 나선 교육자부터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독립투사의 삶까지. 안중근 의사의 일생을 연보로 살펴봅시다.
1879 9월 2일(음력 7월 16일) 부친 안태훈과 모친 조마리아 사이 장남으로 출생 1897 1월 중순 프랑스인 빌렘 신부로부터 토마스(Thomas)라는 세례명을 받음 1905 항일운동의 거점을 만들기 위해 중국 산둥과 상하이 일대 시찰 1906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 운동에 매진 1907 독립운동의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 북간도를 거쳐 러시아 연해주 도착 1908 연해주의군의 우영장으로 국내진공작전 참여 1909 2월 연해주 크라스키노에서 11명의 동지와 동의단지회 결성 1909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파괴하는 원흉 이토 히로부미 사살 1909 11월 3일 뤼순 관동도독부 감옥서로 이송 1910 2월 14일 사형 선고 1910 2월 17일 『동양평화론』 집필 시작 1910 3월 15일 자서전 『안응칠역사』 탈고 1910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감옥서 사형 집행으로 순국
」
■ 전시·영화·소설로 만나는 안중근 의사
「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1910년 3월 26일 31세의 나이로 순국한 안중근 의사. 그의 짧지만 강렬했던 삶은 오늘날까지 전시·영화·뮤지컬·소설 등 다양한 매체의 영감이 되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삶을 기리는 전시와 각종 예술 작품을 소개합니다.
연합뉴스
하얼빈 안중근의사기념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역에 2014년 1월 19일 개관한 전시관. 안중근 의사 흉상을 비롯해 그가 하얼빈에 11일간 머물며 진행한 역사적 의거의 기획 및 준비 과정과 관련된 각종 사진·사료를 만날 수 있다.
안중근의사기념관
자서전 『안응칠역사』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저술한 자서전으로, 1879년부터 1910년까지 30년 7개월간 자신의 생애와 활동을 기술했다. 안중근 의사의 나라사랑 정신과 인간으로서의 위대함이 잘 드러난다.
경기도박물관
전시 '동양지사, 안중근: 통일이 독립이다'
경기도박물관에서 4월 5일까지 열리는 특별전으로, 제국주의 시대를 살았던 안중근 의사의 사상과 철학, 독립운동의 흔적을 소개한다. 특히 국보급 가치를 가진 안중근 의사의 유묵 '장탄일성 선조일본(長歎一聲 先弔日本)'을 만날 수 있다.
전주박물관
전시 '대한국인 안중근 쓰다'
전주박물관에서 3월 8일까지 열리는 특별전. 안중근 의사가 남긴 글씨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였던 그의 치열했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며 의연한 순국, 독실했던 신앙인의 면모까지 살펴본다.
CJ ENM
영화 '영웅'
안중근 의거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동명의 창작 뮤지컬을 각색해 2022년 개봉한 영화. 안중근 의사가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기까지 과정과 순국을 다루며 그의 인간적 고뇌도 조명한다.
문학동네
소설 『하얼빈』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순간과 그 전후의 짧은 나날에 초점을 맞추어 안중근과 이토가 각각 하얼빈으로 향하는 행로를 따라가는 소설. 영웅 안중근이 아닌, 난세를 헤쳐나가는 운명을 마주한 한 인간의 내면에 집중했다.
」
■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안중근 의사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안중근 의사는 천주교 신자 가정에서 자라서 종교적 믿음이 고난을 이겨나가는 힘이 되었을 것 같아요. 독립군 활동 외에도 국내에서 학교를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외국어를 가르쳤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했죠. 또 하얼빈 의거 이후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는데, 오늘날의 외교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해요. 자서전 『안응칠역사』가 필사본으로나마 발견되어 다행이나,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어디에 있는지 아직도 알지 못해 너무 안타까웠어요. 이번 취재를 통해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법정에서 누구보다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행동이 침략과 살육의 근본을 제거하려는 정의감과 평화에 대한 간절함에서 나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김민영(충북 충북여중 1) 학생기자
‘독립운동’ 하면 생각나는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분인 안중근 의사. 이번에 남산에 위치한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안중근 의사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어요. 교과서나 영화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단지와 하얼빈 역에서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까지의 내용이 나오고, 저도 딱 그만큼만 알고 있었죠. 하지만 이번 취재를 통해 안중근 의사의 독립운동 투신 이전 활동과 왜 독립운동에 발을 들이게 되었는지 등등 자세한 내용을 배울 수 있어서 매우 뜻깊었어요.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안중근 의사가 법정에서 밝힌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였어요. 그 장면을 상상만 해도 정말 답답했을 것 같아요. 이번 취재를 통해 독립운동이란 얼마나 많은 용기와 다짐이 필요한지 체감하게 되었어요. 또한 그 모든 것을 이겨내 우리나라 독립을 이끈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 감사해요.
정하은(서울 노원중 1) 학생기자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의 삶과 생각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취재예요. 특히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아들에게 나라와 백성을 먼저 생각하라고 가르치셨고, 나라를 위해 죽는다면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하셨다는 것을 보고 안중근 의사의 깊은 애국심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어요. 또한 그의 독립운동이 단순히 일본에 대한 증오심이 아닌 우리나라가 스스로 설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는 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습니다. 자신보다 나라의 미래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이 정말 대단해요. 독립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희생과 용기 덕분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황지인(서울 봉은초 6) 학생모델
」
글=성선해 기자, 사진=박종범(오픈스튜디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1905년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 4년 후인 1909년 10월 26일. 인파로 가득한 하얼빈역에서 총성이 울렸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선봉 이토 히로부미를 쓰러뜨린 하얼빈 의거죠. 하얼빈 의거는 일제에 맞선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드러내고, 동양평화를 짓밟은 침략자를 응징한 대표적인 반제국주의 항거입니다. 우리가 오늘날까지 안중근이란 이름 석 자를 기억하고 기리는 이유죠. 안중근 의사는 왜 하얼빈 의거를 계획한 걸까요. 또 하얼빈 의거 알라딘릴게임 이전에 안중근 의사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소중 학생기자단이 우리가 잘 몰랐던 안중근 의사의 다양한 면모를 알아보기로 했어요.
김민영 학생기자·황지인 학생모델·정하은 학생기자(왼쪽부터)가 안중근 의사의 삶을 살폈다.
바다이야기게임2서울시 중구 소월로에는 민족정기를 탄압하기 위해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에 1970년 건립·개관한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있어요. 안중근 의사에 관한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고, 그 사상과 정신을 널리 보급하는 곳이죠. 이주화 학예부장이 안중근 의사의 대형 좌상 앞에서 김민영·정하은 학생기자와 황지인 학생모델을 맞이했죠. 우리는 하얼빈 의 바다이야기온라인 거 전후 안중근 의사 행적은 교과서나 영화·뮤지컬·소설 등을 통해 잘 알지만, 독립운동가로 활약하기 전 안중근 의사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상세히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먼저 안중근 의사가 태어난 시대에 나라 안팎으로 무슨 일이 있었으며, 그의 어린 시절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아봅시다.
하얼빈 의거 이전 안중근 의사의 삶 안중근 의사는 릴게임갓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부친 안태훈 진사와 모친 조마리아 여사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했어요. 태어날 때 배와 가슴에 점이 7개가 있어서 아명을 응칠(應七)이라 불렀으며, 어려서부터 한학(漢學)과 말타기·사격술을 익혔죠.
"안중근 의사 출생 전후는 한국이 전근대에서 근대로 전환하던 시기입니다. 당시 조선은 일본군함 운요호의 바다이야기모바일 강화도 침범 사건으로 불평등하게 체결된 강화도조약(1876년), 신식 군인 우대 정책에 불만을 품은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임오군란(1882년), 조선을 근대국가로 만들고자 급진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1884년), 청과 일본이 동학농민군 봉기를 빌미로 벌인 청일전쟁(1894년), 일제가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1895년) 등으로 나라 안팎이 혼란스러웠죠." 당시 조선은 자력으로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이루려 했으나, 역량 부족과 외세의 압력으로 실패했어요. 안중근 의사는 이렇게 500년 역사를 가진 조선이 기울어져 가던 시기에 태어나고 성장한 겁니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안중근 의사가 태어나고 성장한 시기 국내외 정세에 대해 살폈다.
민영 학생기자가 "안중근 의사를 지칭할 때 '도마' 안중근이라고도 하는데, 이 도마가 세례명 토마스(Thomas)를 뜻한다고 들었어요"라고 말했죠. "맞아요. 안중근 의사는 1897년 부친을 비롯한 일가친척들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해 프랑스 출신 빌렘(Wilhelm·洪錫九)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토마스(도마)라는 세례명을 갖게 됐어요. 안중근 의사는 빌렘 신부와 함께 황해도 여러 지역에서 선교활동과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을 펼쳤어요. 빌렘 신부는 교리뿐만 아니라 서양의 문물과 사상, 국제정세 등을 알려주며 안중근 의사가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혀줬죠." 전시실에는 안중근 의사가 빌렘 신부에게 1908년 보낸 엽서도 있었어요.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1세로 순국할 때까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기에 흔히 그의 이름 앞에 도마라는 세례명이 함께하죠.
많은 사람이 안중근 의사를 하얼빈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로 기억하지만, 사실 안중근 의사는 국내에서 구국 운동을 벌이던 교육자로서의 삶을 먼저 시작했어요. 일제는 한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하고,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죠. 1906년에는 일제의 식민 통치 준비기구인 통감부가 설치됐고,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면서 나라의 모든 실권은 이토 히로부미의 수중으로 들어갔어요.
이주화 학예부장이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독립투사의 면모 외에도 안중근 의사의 다양한 모습을 설명했다.
대한제국이 허울만 남은 상황에서 안중근 의사는 나라를 구할 방법을 찾기 위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고, 이곳에서 르 각(Le Gac·郭元良) 신부를 만났죠. 르 각 신부는 구국 방법을 찾던 안중근에게 "국가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서는 교육의 진흥이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했어요. 이에 안중근 의사는 국내로 돌아와 1906년 평안남도 진남포에 중등학교인 삼흥학교를 세우고, 초등학교인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하려 했죠. 국제 감각의 중요성을 깨달은 안중근 의사는 삼흥학교 학생들이 외국어를 배우도록 했어요.
하지만 일제는 더욱 노골적으로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했죠. 일제는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 특사를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로 폐위시키고, 같은 해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도 해산시켰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안중근 의사는 국내 구국운동의 한계를 깨닫고 더욱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러시아 연해주로 향했죠.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보던 하은 학생기자가 "앞서 본 안중근 의사 대형 좌상도 그렇고, 역사 교과서 사진 속 안중근 의사는 왼손 약지의 일부분이 잘려나간 모습이에요.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라고 궁금해했죠.
안중근 의사는 1909년 왼손 약지 마디를 잘라 혈서를 쓰며 조국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왼손 약지 절단은 의병 재기를 다짐하기 위한 애국결사의 결과였어요. 안중근 의사는 1908년 6월 연해주에서 100여 명의 의군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며 승전을 거듭했어요. 일제강점기에 항일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외국에서 군대를 양성해 국내로 진격하는 형식으로 진행된 작전을 국내진공작전이라 해요. 이때 안중근 의사는 포로로 잡은 일본군을 당시 국제법인 '만국공법'에 따라 석방했는데, 이 일로 의병부대의 위치가 노출됐어요. 결국 안중근 의사가 이끈 의병부대는 일본군 본대의 습격을 받아 크게 패했죠. 국내진공작전이 수포로 돌아간 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초 연해주에서 11명의 동지와 함께 동의단지회를 조직했어요. 이들은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의 유지를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하며 왼손 약지 마디를 잘라 '대한독립' 혈서를 썼죠."
소중 학생기자단은 동의단지회 취지문을 살펴봤습니다. 1895년에 고종이 일본과 친일 내각의 압력을 받아 백성들에게 상투와 머리카락을 자르라고 내린 단발령에 전국적으로 거센 반발이 있었을 만큼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는 당시 우리 민족의 공통된 정서였습니다. '작은 털, 피부 하나까지 몸이란 부모님이 주신 것이니 상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건데요. 동의단지회는 '우리가 손가락 하나씩 끊음은 조그마한 일'라며 결의를 다졌죠. 구국을 위한 이들의 결의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에요.
안중근 의사가 1908년 빌렘 신부에게 근황을 알린 엽서.
한국침략·제국주의 선봉 이토 히로부미 처단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는 일본의 초대 총리대신과 한국의 국정 전반을 사실상 장악했던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초프와 동북아 정책을 협의하고자 북만주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한국 병탄의 기초를 구축한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을 처단할 절호의 기회로 본 안중근 의사는 우덕순·조도선과 함께 의거 계획을 세웠죠.
10월 22일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 의사는 그곳 한인회장 김성백의 집에 머물며 의거 결의를 담은 '장부가'를 지었어요. "분개함이 한 번 뻗치니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쥐도적 이등이여 그 목숨 어찌 사람 목숨인고" 등의 구절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향한 굳은 결의를 엿볼 수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단지동맹 당시 그린 혈서 태극기를 담은 엽서.
거사 당일인 10월 26일, 안중근 의사 일행은 의거의 확실한 성사를 위해 두 개의 조로 나눠 대기했어요. 채가구역에서는 우덕순·조도선이, 하얼빈역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의거를 결행하기로 했죠. 채가구역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탄 특별열차를 기다리던 우덕순과 조도선은 실패했지만, 하얼빈역에서 기다리던 안중근 의사가 의거에 성공했어요.
소중 학생기자단은 하얼빈 의거 당시를 재현한 영상을 통해 당시 상황과 분위기를 느껴보기로 했죠. 당시 하얼빈역은 일장기를 높이 들고 이토 히로부미를 반기는 일본인들의 함성과 군악대의 연주 소리로 요란했어요. 러시아 재무대신의 영접을 받은 이토 히로부미가 기차에서 내려 의장대를 사열하고 각국 영사단과 악수하고 되돌아오는 것을 지켜본 안중근 의사는 오전 9시 30분, 권총의 방아쇠를 당겨 이토 히로부미에게 세 발을 명중시켰어요.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짓밟은 침략자 이토 히로부미는 이렇게 안중근 의사의 손에 최후를 맞았습니다.
정하은 학생기자·황지인 학생모델·김민영 학생기자가 안중근 의사의 생애와 사상을 알아봤다.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 『안응칠역사』에는 하얼빈 의거 당시 안중근 의사의 심경이 드러납니다. "러시아 일반 관리들이 호위하고 오는 중에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가진 한 조그마한 늙은이가 이같이 염치없이 감히 천지 사이를 횡행하고 다니는가. ‘저것이 필시 이등 노적일 것이다’ 하고 곧 단총을 뽑아 들고 그 오른쪽을 향해서 4발을 쏜 다음, 생각해 보니 십분 의아심이 머릿속에서 일어났다. 내가 본시 이토의 모습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만일 한 번 잘못 쏜다면 큰일이 낭패가 되는 것이라, 그래서 다시 뒤쪽을 향해서, 일본인 단체 가운데서 가장 의젓해 보이는, 앞서가는 자를 새로 목표하고 3발을 이어 쏜 뒤에 또다시 생각하니, 만일 무죄한 사람을 잘못 쏘았다 하면 일은 반드시 불미할 것이라 잠깐 정지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헌병이 와서 붙잡히니 그때가 바로 1909년 음력 9월 13일 상오 9시 반쯤이었다. 그때 나는 곧 하늘을 향하여 큰 소리로 ‘대한만세’를 세 번 부른 다음, 정거장 헌병 분파소로 붙잡혀 들어갔다."
의거 현장에서 체포된 안중근 의사는 그날 저녁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으로 신병이 인도됐고, 11월 3일 뤼순감옥으로 압송돼 이듬해 3월 26일 순국할 때까지 144일간 수감됐죠. 일제는 심문과 재판을 진행했지만, 일본 외무성은 "안중근에게 극형을 내리라"는 사전 지령을 내리는 등 재판 결과가 나오기 전부터 안 의사를 처형할 방침이었습니다.
하얼빈 의거는 큰 반향을 일으켰고, 국내외 각지에서 안중근 의사 구명운동과 재판에 대비한 의연금 모금 운동도 벌어졌죠. 그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안중근 의사 공판 방청권을 구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일제는 안중근 의사의 한국인이나 외국인 변호사의 선임을 막고 일본인 관선 변호사만 허용하는 등 불법 재판을 강행했죠.
안중근 의사 공판 방청권.
1910년 2월 7일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형사 법정에서 첫 공판이 열렸어요. 안중근 의사는 재판정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 15개 조"를 당당히 밝혔죠. 소중 학생기자단은 전시실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 15개 조를 적은 문서를 살폈습니다. 여기에는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고종 강제 폐위,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 외에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동양 평화를 파괴한 죄 등이 포함됐어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해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의 파괴자라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죠.
일제는 하얼빈 의거를 이토 히로부미의 한국에 대한 통치 정책을 오해하여 저지른 개인적인 살인 행위로 몰아가려 했어요. 이에 맞서 안중근 의사는 "내가 이토를 죽인 것은 한국독립투쟁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도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된 때문이다. 이토를 살해한 후 나는 국제재판에 나가서 이토의 죄악을 일일이 진술하고,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세계에 알릴 생각이었다"라는 대의를 밝히며 대한제국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하다 암살을 결행한 것이라 주장하며 자신을 만국공법에 입각한 전쟁 포로로 대우해줄 것을 요구했죠.
소중 학생기자단이 이주화 학예부장과 함께 안중근 의사의 생애 및 업적과 관련된 여러 유물을 둘러봤다.
그러나 일본인들로 구성된 재판부는 일본 외무성의 사전 지령에 따라 1910년 2월 14일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어요. 안중근 의사는 "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는가?"라고 반문하며 의연한 모습을 보였죠.
사상가이자 문장가이기도 했던 안중근 의사는 뤼순감옥에서 자서전인 『안응칠역사』와 한국의 독립과 인류의 평화를 위한 『동양평화론』(미완성)을 비롯한 여러 유묵을 남겼어요. 『안응칠역사』는 1879년부터 1910년까지 30년 7개월간 자신의 생애와 활동을 기술한 겁니다. 사본만 전하지만, 안중근 의사의 나라 사랑 정신과 인간으로서의 담대함과 위대함을 엿볼 수 있죠.
"『안응칠역사』 사본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지 60년 후 세상에 알려졌어요. 1969년 일본 도쿄의 간다 고서점에서 도쿄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 원장이, 1978년에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고미술상을 경영하던 와타나베 쇼시로가 각각의 사본을 발견했죠. 이듬해인 1979년에는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등사(복사)합본이 세상에 드러났는데 여러분이 앞서 살펴본 안중근 의사의 어린 시절과 교육자로서의 삶 등은 『안응칠역사』를 기반으로 한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의 조부모님 세대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이전의 삶에 대해서는 잘 모르실 수도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집필한 자서전 『안응칠역사』.
『동양평화론』은 안중근 의사가 열흘 동안 작성한 미완성의 논문이에요. 총 다섯 개의 장 중에서 제3~5장 부분을 완성하지 못한 채 순국했죠.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동양평화론』의 일부와 당시 뤼순 고등법원장과의 면담에서 밝힌 소견 등을 통해 안중근 의사가 세상에 남기고 싶었던 동양평화론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어요. 뤼순을 중립지대로 정하여 한·중·일 삼국의 평화기구를 두고, 삼국 공동 화폐를 사용하고 은행을 설치하며, 삼국 청년들로 공동 군대를 만들고 상대국 언어를 습득시켜 우의를 다지게 하자는 것이죠.
"오늘날 동아시아는 북한의 핵무기,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 등으로 정세가 불안하죠. 또 지구 반대편에서는 미군이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을 생포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살던 110여 년 전에도 국제 사회 정세는 매우 불안했어요. 영국 등 제국주의 열강이 지구의 반을 다스리며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죠. 안중근 의사는 어떻게 하면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올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했어요."
흔히 독서 관련해서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을 텐데요. 이 문장은 안중근 의사가 뤼순 옥중에서 순국하기 직전까지 남긴 200여 점의 유묵(遺墨) 중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을 뜻합니다. 소중 학생기자단은 안중근 의사가 남긴 여러 유묵을 살폈어요. 그중 31점이 국가 보물로 지정돼 있죠.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는 내용인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 독립에 대한 의지와 염원이 집약된 유묵인 '독립(獨立)' 등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있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여 전 세계 제국주의 세력에 경종을 울린 안중근 의사는 옥중에서 동포·어머니·아내와 빌렘 신부 등에게 유서를 남겼어요.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기 전 '일제에 항소하지 말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뜻을 전하기도 했죠.
1910년 3월 26일 어머니가 보내준 흰색 명주 한복을 입은 안중근 의사는 "내가 한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동양 평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 한·일 양국이 협력하여 동양 평화가 이루어지길 바랄 뿐이다"라는 마지막 당부를 남기고 간수에 이끌려 교수대에 올라 순국했습니다.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뤼순 옥중에서 순국하기 직전까지 남긴 여러 유묵도 살펴볼 수 있다.
안중근 의사가 유언을 남기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던 지인 학생모델이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어디에 있나요"라고 질문했어요. 이 학예부장은 소중 학생기자단을 한 장의 전보 앞으로 데려갔습니다. 여기에는 '안중근 사형 집행 끝'이라는 짧은 문장만 적혀있었어요.
"보통 사형을 집행하고 나면 이 사람을 어디에 묻었는지, 누구에게 시신을 인도했는지 등을 전보에 적습니다. 그런데 이 전보에는 안중근 의사가 묻힌 장소가 표기돼 있지 않아요. 안중근 의사의 묘소가 한국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 한 일제가 정근·공근 두 동생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시신을 인도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안중근 의사는 생전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옮겨 묻어달라'고 요청했지만, 안 의사의 유해는 비밀리에 뤼순감옥 공동묘지에 묻혔고 지금까지도 정확한 위치를 몰라 고국으로 송환되지 못하고 있어요."
하얼빈 의거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강점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안중근 의사의 투지와 구국열은 이후 강우규·김상옥·나석주·이봉창·윤봉길 등 후대의 여러 독립운동가에게 계승됐어요. 백범 김구는 안중근 의사를 '한국 독립운동의 지주'로 받들기도 했죠.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집필한 자서전 『안응칠역사』.
그의 가문 역시 안중근 의사의 신념을 이어갔습니다.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임시정부 경제후원회와 상하이 재류동포 정부경제후원회에서 활동하며, 가문 인사 및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죠. 또 안중근 의사의 동생 공근·정근 형제는 임시정부·한인애국단 등에서 활약했으며, 사촌 안명근도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세우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했어요.
평생을 구국에 헌신해 교육자·독립운동가로 살았던 안중근 의사의 삶은 향후 일제에 맞선 한민족 독립운동의 이정표가 됐고, 그가 저서·유묵 등을 통해 남긴 사상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어요.
서울 남산에 있는 안중근의사기념관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에 안중근 의사의 사상과 정신을 보급하기 위해 1970년 건립됐다.
동행취재=김민영(충북 충북여중 1)·정하은(서울 노원중 1) 학생기자·황지인(서울 봉은초 6) 학생모델
■ 안중근 의사 연보
「 구국에 나선 교육자부터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독립투사의 삶까지. 안중근 의사의 일생을 연보로 살펴봅시다.
1879 9월 2일(음력 7월 16일) 부친 안태훈과 모친 조마리아 사이 장남으로 출생 1897 1월 중순 프랑스인 빌렘 신부로부터 토마스(Thomas)라는 세례명을 받음 1905 항일운동의 거점을 만들기 위해 중국 산둥과 상하이 일대 시찰 1906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 운동에 매진 1907 독립운동의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 북간도를 거쳐 러시아 연해주 도착 1908 연해주의군의 우영장으로 국내진공작전 참여 1909 2월 연해주 크라스키노에서 11명의 동지와 동의단지회 결성 1909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파괴하는 원흉 이토 히로부미 사살 1909 11월 3일 뤼순 관동도독부 감옥서로 이송 1910 2월 14일 사형 선고 1910 2월 17일 『동양평화론』 집필 시작 1910 3월 15일 자서전 『안응칠역사』 탈고 1910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감옥서 사형 집행으로 순국
」
■ 전시·영화·소설로 만나는 안중근 의사
「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1910년 3월 26일 31세의 나이로 순국한 안중근 의사. 그의 짧지만 강렬했던 삶은 오늘날까지 전시·영화·뮤지컬·소설 등 다양한 매체의 영감이 되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삶을 기리는 전시와 각종 예술 작품을 소개합니다.
연합뉴스
하얼빈 안중근의사기념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역에 2014년 1월 19일 개관한 전시관. 안중근 의사 흉상을 비롯해 그가 하얼빈에 11일간 머물며 진행한 역사적 의거의 기획 및 준비 과정과 관련된 각종 사진·사료를 만날 수 있다.
안중근의사기념관
자서전 『안응칠역사』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저술한 자서전으로, 1879년부터 1910년까지 30년 7개월간 자신의 생애와 활동을 기술했다. 안중근 의사의 나라사랑 정신과 인간으로서의 위대함이 잘 드러난다.
경기도박물관
전시 '동양지사, 안중근: 통일이 독립이다'
경기도박물관에서 4월 5일까지 열리는 특별전으로, 제국주의 시대를 살았던 안중근 의사의 사상과 철학, 독립운동의 흔적을 소개한다. 특히 국보급 가치를 가진 안중근 의사의 유묵 '장탄일성 선조일본(長歎一聲 先弔日本)'을 만날 수 있다.
전주박물관
전시 '대한국인 안중근 쓰다'
전주박물관에서 3월 8일까지 열리는 특별전. 안중근 의사가 남긴 글씨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였던 그의 치열했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며 의연한 순국, 독실했던 신앙인의 면모까지 살펴본다.
CJ ENM
영화 '영웅'
안중근 의거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동명의 창작 뮤지컬을 각색해 2022년 개봉한 영화. 안중근 의사가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기까지 과정과 순국을 다루며 그의 인간적 고뇌도 조명한다.
문학동네
소설 『하얼빈』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순간과 그 전후의 짧은 나날에 초점을 맞추어 안중근과 이토가 각각 하얼빈으로 향하는 행로를 따라가는 소설. 영웅 안중근이 아닌, 난세를 헤쳐나가는 운명을 마주한 한 인간의 내면에 집중했다.
」
■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안중근 의사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안중근 의사는 천주교 신자 가정에서 자라서 종교적 믿음이 고난을 이겨나가는 힘이 되었을 것 같아요. 독립군 활동 외에도 국내에서 학교를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외국어를 가르쳤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했죠. 또 하얼빈 의거 이후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는데, 오늘날의 외교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해요. 자서전 『안응칠역사』가 필사본으로나마 발견되어 다행이나,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어디에 있는지 아직도 알지 못해 너무 안타까웠어요. 이번 취재를 통해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법정에서 누구보다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행동이 침략과 살육의 근본을 제거하려는 정의감과 평화에 대한 간절함에서 나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김민영(충북 충북여중 1) 학생기자
‘독립운동’ 하면 생각나는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분인 안중근 의사. 이번에 남산에 위치한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안중근 의사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어요. 교과서나 영화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단지와 하얼빈 역에서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까지의 내용이 나오고, 저도 딱 그만큼만 알고 있었죠. 하지만 이번 취재를 통해 안중근 의사의 독립운동 투신 이전 활동과 왜 독립운동에 발을 들이게 되었는지 등등 자세한 내용을 배울 수 있어서 매우 뜻깊었어요.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안중근 의사가 법정에서 밝힌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였어요. 그 장면을 상상만 해도 정말 답답했을 것 같아요. 이번 취재를 통해 독립운동이란 얼마나 많은 용기와 다짐이 필요한지 체감하게 되었어요. 또한 그 모든 것을 이겨내 우리나라 독립을 이끈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 감사해요.
정하은(서울 노원중 1) 학생기자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의 삶과 생각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취재예요. 특히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아들에게 나라와 백성을 먼저 생각하라고 가르치셨고, 나라를 위해 죽는다면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하셨다는 것을 보고 안중근 의사의 깊은 애국심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어요. 또한 그의 독립운동이 단순히 일본에 대한 증오심이 아닌 우리나라가 스스로 설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는 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습니다. 자신보다 나라의 미래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이 정말 대단해요. 독립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희생과 용기 덕분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황지인(서울 봉은초 6) 학생모델
」
글=성선해 기자, 사진=박종범(오픈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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